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 왕조 (문단 편집) === [[제노(로마)|제노]](474~491) === 소아시아 타우루스 산맥의 산악민족인 이사우리아 족장으로, 본명은 타라시코디사 루숨블라데오테스다. 레오 1세의 딸 [[아일리아 아리아드네]]와 결혼한 뒤 이름을 제노로 바꿨다. 473년 11월 아들 [[레오 2세(황제)|레오 2세]]와 함께 공동 황제로 지명되었고, 474년 1월 18일 레오 1세가 사망한 뒤 선임 군주가 되었으며, 같은 해 11월 10일 레오 2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단독 황제가 되었다. 그러나 로마인들에게 야만인으로 멸시받던 이사우리아인 출신이었기 때문에, 즉위 직후부터 숱한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. 475년 1월 9일 전 황제의 황후 [[아일리아 베리나]]와 오빠 [[바실리스쿠스]]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사우리아로 도피하였고, 바실리스쿠스가 일시적으로 제위에 올랐다. 그러나 바실리스쿠스가 베리나의 애인을 죽이자, 베리나는 마음을 바꿔 제노와 손을 잡았다. 여기에 당초 제노를 잡으려 했던 [[일루스]] 장군이 바실리스쿠스가 동족인 이사우리아인들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제노와 연합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갔다. 그 결과 제노는 476년에 바실리스쿠스를 축출하고 황위에 복귀했다. 이렇듯 혼란스러운 와중에 [[오도아케르]]가 [[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]]를 폐위하고 [[서로마 제국]]을 멸망시켰다. 479년, 이번엔 레오 1세의 사위이자 [[마르키아누스]]의 외손자인 [[플라비우스 마르키아누스]]가 반란을 일으켰다. 제노는 이때 거의 축출될 뻔했지만, 일루스가 반격을 가해 반란군을 섬멸하면서 황위를 간신히 지킬 수 있었다. 이후 [[아일리아 베리나]]와 [[일루스]]간의 알력다툼이 심해졌고, 급기야 베리나가 보낸 자객의 습격으로 귀가 잘린 일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. 그런데 정작 일루스는 당시 유배중이던 베리나를 풀어준 뒤 자기가 황제로 추대한 [[레온티우스]]를 지지하게 하였다. 일루스가 자기를 여러번 죽이려 했던 베리나를 풀어준 까닭이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나, 황실의 일원인 그녀를 이용해 레온티오스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술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. 그러나 거듭된 반란에 지친 백성들은 호응하지 않았고, [[테오도리크]]가 이끄는 동고트군이 제노의 부탁을 받아들여 반란군을 격파했다. 반란군은 이사우리아의 파피리우스 요새에서 4년간 항전했으나 끝내 함락되었고, 일루스는 처단되었다. 484년, 제노와 [[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]] [[아카키오스]]는 [[삼위일체론]]과 [[단성론]]의 대립이 극렬한 상황에서 양자의 화해를 이끌어내기 위해 <헤노티콘>을 발표했다. 그러나 로마 교황 [[펠릭스 3세]]가 반발하여 아카키오스를 [[파문]]했고, 아카키오스 역시 교황의 이름을 딥티코스(diptyque)에서 삭제했다. 이리하여 발생한 [[아카키오스 분열]]은 장장 50년간 지속되다 [[유스티누스 1세]] 시기인 519년에서야 종결되었다. 488년, 제노는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뒤 이탈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[[오도아케르]]를 축출하기 위해 동고트 지도자 [[테오도리크]]에게 오도아케르를 몰아내고 이탈리아에 정착하라고 제안했다. 테오도리크는 이를 받아들여 이탈리아로 진격하였고, 493년 오도아케르를 주살하고 이탈리아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